나의 도시, 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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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씨 프랑스 갈 생각 있나?"라는 질문을 네 달 전에 들었을 때도, "단체별로 한명씩 파리를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그리고 한 달 반 전에 이 질문을 들었을 때에도... 이 때까지만 해도 '에이, 무슨 파리야.... 40분 거리에 있는 부모님 댁도 못가는데...'라고 별 기대 없이 넘겼었다. 그런데, 정말 파리를 다녀오게 되었다! 레지던시 국제교류를 위한 초석을 다지라는 굳은 명을 받고 파리로 향했다.

여전히 더러운 도시 파리
5년 전에 배낭여행으로 찾은 파리는 실망스러웠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겪은 인종차별 섞인 비웃음에, 길 잃은 여행자를 위한 친절함도 없고,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모를 불어까지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5년 만에 다시 찾은 파리는 어떨까?

이 나라에는 그래피티가 참 많다. 공항에서 파리 도심지로 향하는 고속도로 길가, 광장을 둘러 싼 벽 위, 온 지하철 라인들이 만나는 샤틀레역 주변에도 여기저기 재미있는 그림과 글씨들을 만날 수 있다. 가끔 만나는, 예상치 못한 길 가의 예술품은 재미있는데, 예상할 수 있는 모든 벽과 길가 위의 수많은 물량은 즐거움 보다는 지저분하다는 느낌을 줄 뿐이다.

 

그렇게 멋진 도시라며 왜 이리 도시를 아끼지 않는지, 여기저기 낙서질(?)인지... 이때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여전히 더럽고, 정신 산만한, 그저 그런 도시였다.

관공서에서 만들어진 건데 너무 노골적인거 아니야?
파리의 집세는 서울의 강남만큼이나 살인적이다. 그래서 너도 나도 조금은 과격하고 엉뚱한 방법을 택해 거주를 해결하기도 한다고. 거주용 집을 찾든, 작업실을 찾든 버려진 건물을 찾아 침입하고 무단으로 거주한다. 이렇게 살다 법으로 정해진 일정 기간을 넘기면 도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협상을 해주고 적절한 임대료 하에 그 공간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준다. 이게 바로 스쾃(SQUAT)이다. 목적은 다양하지만 예술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스쾃 공간 몇 군데를 방문해 보았다.

노틀담 성당에서 조금 걸으면 값 비싼 상점들이 위치한 리볼리 거리가 나온다. 그 중 빨간 페인트 선이 들어가고, 알록달록한 장식을 입힌 한 건물이 보인다. 예술가들의 커뮤니티로 유명한 '59리볼리(59Rivoli)'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둥글게 위로 이어지는 계단과, 아주 긴 용 한마리가 방문객들을 이끈다.

▲오른편에서는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용을 볼 수 있다.

4층에서 5층 정도 되는 건물에 매 층은 각기 다른 예술가들이 입주하여 재미있는, 때로는 괴기스런 작업을 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마블의 히어로 주인공을 소재로 한 작품들, 그리고 빠리의 상징인 바게뜨로 만든 작품들 등 매우 다양한 작품들과 작업환경을 둘러 볼 수 있다. 한 가지 매우 신기한 것은 구매를 유도하는 소품들과 작품들이 많다는 점이다.


관람객의 구매를 유도하는 소품들이 여기저기 있다.

리볼리는 시에서 운영하는 예술가들의 공간이다. 한국의 경우 관공서에서 진행되는 공간이라면 판매는 커녕 아주 약간의 수익활동 조차 철저하게 금할 것이다. 리볼리처럼 대전시에서 운영하는 '대전테미창작센터'는 작품이든, 아트상품이든 대체로 판매와 관련된 활동을 지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술가와 관객들, 지역 주민들이 만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예술가들의 노출기회를 확대시키는 일에는 매우 적극적이다.

파리의 59Rivoli / 대전의 테미창작센터 (사진은 테미창작센터 공식 홈페이지에서 발췌)

리볼리에 비하면 테미는 5성급 호텔이다. 테미가 정해진 기간에만 오픈하며 예술가들의 사적인 시간과 작업공간을 존중해주는 동안 리볼리는 한해 내내 문 닫지 않고 과감하게 작가들의 사적인 공간을 활짝 개방한다.

만물 장소 같은 라 제네랄
대전에는 공간의 재탄생으로 이루어진 예술단체(현재 대전시에서 예술가 레지던시 사업을 진행중이기도 하다.) 두 곳이 있다. '문화공간 주차', 그리고 '산호여인숙'은 모두 처음부터 '예술 공간'은 아니었다. 문화공간 주차는 말 그대로 주차장이었고, 산호여인숙 역시 많은 사람들이 묵고 여행의 피로를 풀고 가는 여인숙이었다. 버려진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숨을 불어 넣은 모습이 마치 스쾃의 모습을 닮아있기도 하다.
'문화공간 주차'가 주차장에서 재미있는 예술활동을 진행하는 것처럼 ‘라 제네랄(La Generale)역시 버려진 창고를 스쾃하여 수백명의 예술가들에 의해 새롭게 탄생하였다. 주차 되어있는 낡은 차 뒤 쪽의 커튼을 걷으면 전시공간, 커튼을 활용한 암막의 공연장, 혹은 세미나를 하는 다목적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표인 엠마뉴엘이 일행을 이끌고 공간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지하와 옥상층은 아직도 스쾃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공간을 소유한 주인과 적절한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두 공간은 여전히 불법이라며 거듭 강조하며 이야기 해준다.

라 제네랄의 모습

지하 공간은 종이박스로 작업 하는 작가의 작업실이 되었고, 옥상에서는 쌀쌀한 가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식물이 자라기에 썩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단순히 성공과 실패에만 국한된 작업은 아니라고 한다. 예술가로서의 작업을 함과 동시에 지역의 학생들에게 오픈하여 현장학습의 장으로 공유하는 공간이기도 하단다. 흥미롭기도 하고 듣자마자 걱정이 되기도 한다. 불법으로 점유한 공간인데 학생들을 데리고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니? 우리나라였다면 교직원 및 학부모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

여전히 스쾃이 진행중인 지하와 옥상

예술로 녹여버린 냉동창고 공장, 르 프리고


내부에는 여전히 장비와 시설이 남아있어 공장이었던 과거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버려진 냉동창고공장을 스쾃하여 수 십명의 예술가들이 작업하는 '르 프리고(Les Frigos, 이하 프리고)'이다. 이래 허름해 보여도 입주하기는 쉽지 않다. 신청을 하고 허락이 떨어져야 몇 년 동안 기다리고 들어올까 말까 한 공간이다. 프리고의 문은 '59리볼리'처럼, 혹은 '라 제네랄'처럼 늘 활짝 열려있지는 않다. 하지만 매년 5월이 되면 대중들과 전 세계의 콜렉터들을 위해 한달간 오픈 스튜디오를 진행한다고 한다.

여기저기 문이 굳게 닫혀있어 그냥 나가려던 찰나 운 좋게 열려있는 문을 발견하고 들어가봤다. 프랑스의 유명한 명품인 루이비통 가죽 위에 전라의 여성을 그리는 작업을 하는 작가 '래리', 마침 도마뱀 가족이 살고 있는 어항을 청소중이라며 신나서 여기 저기 구경을 시켜준다. 냉동 창고이다 보니 방 하나만 해도 공간이 굉장히 널찍해서 여러 명이서 함께 공유할 수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작가는 전 세계의 알파벳, 문자를 이용한 조소 작업을 하는데, 우리가 방문하기 전인 9월에 다른 한국 팀이 왔다간다고 한다. 자신이 나온 잡지를 보여주며 신기하고, 미소 진 얼굴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왼쪽) 프리고에서 작업을 하는 회화작가 래리와 그의 동료의 작업실, (오른쪽) 프리고의 터주대감 리무잔 작가

다음 층을 올라가서 서성이다 보니 막 문을 닫으려는 한 작가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들어가도 되냐고 물어보니 "Exception only(예외는 있는 법이죠)"라며 흔쾌히 들여보내 준다. 이곳에서 작업하는 작가는 '리무잔(Limousine)'이라는 교수이자 예술가이다. 3~40년동안 전기도 가스도 없이 생활하다 최근에야 첫 번째 계약을 기다리고 있다는 프리고의 터줏대감이다. 자신의 강의에 한국인 학생들이 많다며 작품설명, 그리고 장소에 대한 이것저것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준다.

프리고는 59리볼리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다가온다. 단순히 규모가 더 크고, 더 많은 예술가, 더 많은 그래피티가 있어서 라기 보다는 시각예술부터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까지 예술 분야에 관계없이 많은 작가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건물 벽에는 그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들을 알리기 위한 홍보글과, 그리고 프리고의 여러 행사들이 소개되어있어서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듯 하다.

지역민이 예술가로, 벨빌 예술가 협회
앞서 만나본 '59 리볼리', '프리고', 그리고 '라 제네랄'은 매우 예술가스러운 공간이고 단체이다. 과거에 우리가 한번쯤은 떠올려 보았던 방 한켠에서 그림만 그리고 세상과 소통 없을 것 같은, 그런 예술가의 느낌이 가득 스며들어 있는 곳들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본업인 작품 활동만 해도 되지만, 그들이 세상과 교류하고 소통 할 때 더 가치있고 재밌는 결과가 나오곤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 부쩍 사회는 예술가들에게 '공공예술', 혹은 '소통하는 예술'을 요구하곤 한다.

파리의 '벨빌(Belleville)', 그리고 '메닐몽땅(Ménilmontant)'이라는 아주 작은 동네는 대전의 대흥동처럼 저렴한 집값에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작업실과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지도를 워낙에 볼 줄을 몰라 헤매이다 친절한 파리지엥을 만나 겨우 찾게 된 '벨빌 예술가 협회(Ateliers d'Artistes de Belleville)'가 대표적인 벨빌의 예술가 공동체이다.


벨빌 예술가 협회, 그리고 구성원 중 한명인 작가 베아트리스

이 곳 벨빌에 거주하고 있는 수 백명의 거주민이자 예술가들이 모여 만든 협회이고, 조금은 작지만 이 공간에서 꾸준히 전시를 열고 브라질, 아시아의 몇 나라와 꾸준한 교류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 ‘베아트리스(Beatrice)'가 자신의 작품 설명, 그리고 협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준다.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무실의 다른 멤버에게 물어가며 질문에 답해주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벨빌 미술가 협회는 단체를 유지하기 위한 수익 사업으로 꾸준히 아트상품을 개발하는 편이다. 올해 25번째 생일을 맞아 발매된 기념 뱃지, 그리고 예술가 거리 벨빌을 소개하는 DVD, 서적 등 각종 아카이브 자료, 혹은 소속 작가들이 직접 완성한 소품 사이즈의 캔버스 작품까지 다양한 상품을 준비했다.

벨빌 예술가 협회는 자립을 위해 아트상품을 꾸준히 개발하여 수익구조를 창출해 낸다.

갤러리 운영을 하며 가장 목말라 있는 부분은 '관객'이기에 조심스럽게 하루 방문객이 얼마냐고 물었다. 매 전시가 있을 때마다 방문객을 카운팅한다며 37이라는 숫자가 적힌 표를 보여준다. 지난밤에야 전시 준비를 마치고 정식 오픈을 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매우 적은 인원이라며 안타까워 하지만 오늘 저녁 오픈 식을 거치면 방문객 수가 많아질 거라며 웃는다.

관광책자에는 접근 금지 구역인데...?

 

(사진 첫 번째 줄 ‘104’) 엠마뉴엘이 소개해준 또 다른 재미있는 공간. 한국 관광책자에서 이 곳은 여행 위험 구역이라고 표시해뒀단다. 도시 개발 정책의 일환으로 강력한 마약 거래 단속이 이루어졌고 다수의 거래인들이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근처로 이동하며 위험지역이 되었다. '104(Le Centquatre)'에서는 써커스, 연극, 댄스, 무용, 거리예술을 하는 젊은이들이 찾아와 즐기는 역동적인 공간이다.

(사진 두 번째 줄 벨빌 주변의 갤러리들) 유럽의 쉥겐조약은 예술가들의 지리적 경계를 허물어 놓았다. 벨빌 거리의 작은 갤러리를 방문하면 스페인, 독일, 등 유럽 여러나라의 작가들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일주일 동안 여러 곳을 돌아다닌 후 이제서야 왜 파리를 자유와 낭만의 도시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빠리의 자유와 낭만 속에는 ‘내 것’이라는 '주인의식'이 숨어있는 듯 하다. 불법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숨어 지내기보다는 내가 찾은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고 함께 나누는 라제네랄의 예술가, 벽과 길거리 위의 그래피티는 단순한 낙서가 아닌 나의 도시를 위한 소리 없는 발언이며, 도시를 아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의 도시를 사랑하는 만큼 구석구석을 만져 주는 것 등의 행동들이 곧 자유와 낭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어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그리고 주체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빠리지앵들이 있어 오늘도 빠리에는 낭만과 자유가 있다.​

/ 전해리 (2015 대전문화예술 서포터즈)